[기고문] 만남, 그리고 이별 (최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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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그리고 이별
-최태진-
어디쯤을 가고 계실까···. 갑작스럽게 우리들의 곁을 떠난 동료문우 이진옥고문에 대한 애석한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아직도 눈에 선한 기억은 2025년 12월 5일 `로스 안데스 문학’ 출판기념식 장면이다. 연륜이 묻어나는 이진옥 고문 가야금연주와 회원들의 열띤 백난아 찔래 꽃 합창으로 작은 음악회를 마무리 했다. 그리고 12월 15일 자택에서 낙상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19일 고 이진옥권사(향년85세) 황당하고 당황스런 부고를 받았다. 불과 며칠 전에만 하더라도 화제의 문자메시지를 내게 보내 주시던, 이고문님을 떠나 보내는 상심은 허무였다. 일상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그런 이별의 허전함 때문 많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만남과 헤어짐, 어떠한 관계의 만남이던 죽음은 가련한 생의 존재가치이며 슬픔이다. 그리고 떠난 사람은 모른다. 남아있는 이별의 아픔을···.
이진옥 고문과의 인연은 아르헨티나 이주 후에 글을 쓰기 시작 하면서부터다. 낮 설고 생소한 열대의 나라 파라과이이민 10여 해 생활을 정리하고 1,988년 2월, 우리가족이 재 이주하여 정착한 지역은 QUILMES의 BERNAL OESTE였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QUILMES시내 중학교를 다녔고, 나는 현지인 환자를 진료하는 침술원을 운영하면서 공백시간을 메워야 했기에 A4용지 볼펜 글을 썼다. 손으로 쓴 가난한 글들을 타이핑 해서 주말특집과 생활코너에 편집되도록 해 주신 분이 한국일보 아르헨티나지사 이진옥 실장님이셨다. 그러던 1994년 1월 어느 날이었다. 한국일보에 기사를 보낸 분들께 저녁식사대접을 준비한다면서, CASTAŇARE y COREA 길 이층 식당으로 오라는 이진옥 실장님 전화연락을 받았다. 다음 날 그곳 음악인 정ㅇㅇ씨가 운영하는 식당에 도착하니 이미 20여명이 넘는 글을 쓰는 분들이 와있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문인들을 초대한 문인협회 창립 준비모임이었다.
재아 문인협회가 있기까지는 한국일보 아르헨티나지사 이진옥 실장님 관심이 컸다. 1993년 10월, 한국일보에서 해마다 실시하던 이민수기공모전 심사 후 심사위원들이 문인협회 창립을 논의하면서 손성래 지사장 옵서버, 1,994년 1월 총회가 설립되며 재아 한인 문인협회 긴 역사가 시작됐다. 불모지에서 일군 땅끝마을의 한글문학 로스 안데스, 나에게는 로스 안데스 문학이 맺어준 기억해야 할 소중한 인연이 하나 더 있다. 지금은 박사학위를 받고 University of Hoston 대학 교수로 재직중인 재미 동포 최ㅇㅇ씨와의 만남이다. 한인 이민문학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아르헨티나를 찾은 연구생 최ㅇㅇ씨는 문인협회 감사인 나를 찾아오게 되었고, 로스 안데스 문학 창간창호부터 2023년 당시 통권 제 21호 까지를 모두 복사해서 미국으로 가져가 학위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로스 안데스 이민문학을 재조명, 문학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게 된 최ㅇㅇ씨는 역사박물관 기증 제의를 내게 해 주었다. 의미 있는 제의에 동의하게 되면서 2024년 5월, 창간호부터 통권 제 23호까지를 정갈하게 포장해서 주재 대사관 도움으로 서울 재외동포청에 보낼 수 있었다. 재아 문인협회 `로스 안데스 문학’은 재외동포 청 국제협력센터 이민연구실 소중한 자료로 관리하고 있다.
2015~2018년, 18대 19대 문인협회 회장을 맡고부터는 의외로 한국일보를 찾아가야 할 일이 많아졌다. 이진옥 고문을 만나는 대화 중에 조금이라도 못마땅한 내용이 있기라도 하면 지체 없이 토를 달았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감히, 이진옥 실장님과 언성을 높이며 대드는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신문사에 와서 실장님과 다투는 분은 최선생님밖에 없다”라고 하던, 편집부 직원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렇게 언성을 높이다가도 다음날 만나면 언제 그랬더냐 늘 반갑게 긍정의 대화를 이어갔다. 오랜 세월의 인연이었지만, 어처구니 없는 오해나 나쁜 감정은 내 기억으론 없다. 서로의 견문을 넓히면서 정든 경우였다고 회상한다.
인터넷 매체가 활발해 지면서 아르헨티나지사 한국일보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엎친 데 덮친다더니 이진옥 실장님 발병이 겹치기 시작했다. 위 절제수술 후 회복이 되는가 싶더니 대상포진이 발병했다. 신문사를 유지하기엔 다방면으로 어려움이 많아지면서 양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40여 해 천직으로 여기던 신문사를 그만두게 되는 아쉬움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괴롭힘은 이진옥 고문 건강문제였다. 대상포진이 다 아물기도 전 뇌종양 수술을 받아야 했고, 뇌종양 수술회복이 될 즈음 넘어져 양쪽 정강이 뼈 골절상을 입기도 했었다. 이 모든 불운이 부군 손성래 사장님 뇌졸중으로 자리에 눕게 되는 동시에 감당해야 할 우환이었으니, 곁에서 지켜보는 심정은 안쓰럽고 가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문은 고통을 호소하거나 불만을 말 한적이 없다. 자신의 몸 가눔도 성치 않은데, 지극정성 남편 병수발을 들었다는 초인적인 정신력은 존경의 머리가 숙여진다. 평소 냉철하면서도 따듯한 분이셨던 이진옥 고문님, 천륜 이별의 아픔 중에 기도합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엔 창공을 나르는 새가 되소서. 밝고 아름다운 꽃 길 되소서.”
2,026-01-21
-최태진-
어디쯤을 가고 계실까···. 갑작스럽게 우리들의 곁을 떠난 동료문우 이진옥고문에 대한 애석한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아직도 눈에 선한 기억은 2025년 12월 5일 `로스 안데스 문학’ 출판기념식 장면이다. 연륜이 묻어나는 이진옥 고문 가야금연주와 회원들의 열띤 백난아 찔래 꽃 합창으로 작은 음악회를 마무리 했다. 그리고 12월 15일 자택에서 낙상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19일 고 이진옥권사(향년85세) 황당하고 당황스런 부고를 받았다. 불과 며칠 전에만 하더라도 화제의 문자메시지를 내게 보내 주시던, 이고문님을 떠나 보내는 상심은 허무였다. 일상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그런 이별의 허전함 때문 많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만남과 헤어짐, 어떠한 관계의 만남이던 죽음은 가련한 생의 존재가치이며 슬픔이다. 그리고 떠난 사람은 모른다. 남아있는 이별의 아픔을···.
이진옥 고문과의 인연은 아르헨티나 이주 후에 글을 쓰기 시작 하면서부터다. 낮 설고 생소한 열대의 나라 파라과이이민 10여 해 생활을 정리하고 1,988년 2월, 우리가족이 재 이주하여 정착한 지역은 QUILMES의 BERNAL OESTE였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QUILMES시내 중학교를 다녔고, 나는 현지인 환자를 진료하는 침술원을 운영하면서 공백시간을 메워야 했기에 A4용지 볼펜 글을 썼다. 손으로 쓴 가난한 글들을 타이핑 해서 주말특집과 생활코너에 편집되도록 해 주신 분이 한국일보 아르헨티나지사 이진옥 실장님이셨다. 그러던 1994년 1월 어느 날이었다. 한국일보에 기사를 보낸 분들께 저녁식사대접을 준비한다면서, CASTAŇARE y COREA 길 이층 식당으로 오라는 이진옥 실장님 전화연락을 받았다. 다음 날 그곳 음악인 정ㅇㅇ씨가 운영하는 식당에 도착하니 이미 20여명이 넘는 글을 쓰는 분들이 와있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문인들을 초대한 문인협회 창립 준비모임이었다.
재아 문인협회가 있기까지는 한국일보 아르헨티나지사 이진옥 실장님 관심이 컸다. 1993년 10월, 한국일보에서 해마다 실시하던 이민수기공모전 심사 후 심사위원들이 문인협회 창립을 논의하면서 손성래 지사장 옵서버, 1,994년 1월 총회가 설립되며 재아 한인 문인협회 긴 역사가 시작됐다. 불모지에서 일군 땅끝마을의 한글문학 로스 안데스, 나에게는 로스 안데스 문학이 맺어준 기억해야 할 소중한 인연이 하나 더 있다. 지금은 박사학위를 받고 University of Hoston 대학 교수로 재직중인 재미 동포 최ㅇㅇ씨와의 만남이다. 한인 이민문학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아르헨티나를 찾은 연구생 최ㅇㅇ씨는 문인협회 감사인 나를 찾아오게 되었고, 로스 안데스 문학 창간창호부터 2023년 당시 통권 제 21호 까지를 모두 복사해서 미국으로 가져가 학위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로스 안데스 이민문학을 재조명, 문학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게 된 최ㅇㅇ씨는 역사박물관 기증 제의를 내게 해 주었다. 의미 있는 제의에 동의하게 되면서 2024년 5월, 창간호부터 통권 제 23호까지를 정갈하게 포장해서 주재 대사관 도움으로 서울 재외동포청에 보낼 수 있었다. 재아 문인협회 `로스 안데스 문학’은 재외동포 청 국제협력센터 이민연구실 소중한 자료로 관리하고 있다.
2015~2018년, 18대 19대 문인협회 회장을 맡고부터는 의외로 한국일보를 찾아가야 할 일이 많아졌다. 이진옥 고문을 만나는 대화 중에 조금이라도 못마땅한 내용이 있기라도 하면 지체 없이 토를 달았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감히, 이진옥 실장님과 언성을 높이며 대드는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신문사에 와서 실장님과 다투는 분은 최선생님밖에 없다”라고 하던, 편집부 직원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렇게 언성을 높이다가도 다음날 만나면 언제 그랬더냐 늘 반갑게 긍정의 대화를 이어갔다. 오랜 세월의 인연이었지만, 어처구니 없는 오해나 나쁜 감정은 내 기억으론 없다. 서로의 견문을 넓히면서 정든 경우였다고 회상한다.
인터넷 매체가 활발해 지면서 아르헨티나지사 한국일보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엎친 데 덮친다더니 이진옥 실장님 발병이 겹치기 시작했다. 위 절제수술 후 회복이 되는가 싶더니 대상포진이 발병했다. 신문사를 유지하기엔 다방면으로 어려움이 많아지면서 양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40여 해 천직으로 여기던 신문사를 그만두게 되는 아쉬움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괴롭힘은 이진옥 고문 건강문제였다. 대상포진이 다 아물기도 전 뇌종양 수술을 받아야 했고, 뇌종양 수술회복이 될 즈음 넘어져 양쪽 정강이 뼈 골절상을 입기도 했었다. 이 모든 불운이 부군 손성래 사장님 뇌졸중으로 자리에 눕게 되는 동시에 감당해야 할 우환이었으니, 곁에서 지켜보는 심정은 안쓰럽고 가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문은 고통을 호소하거나 불만을 말 한적이 없다. 자신의 몸 가눔도 성치 않은데, 지극정성 남편 병수발을 들었다는 초인적인 정신력은 존경의 머리가 숙여진다. 평소 냉철하면서도 따듯한 분이셨던 이진옥 고문님, 천륜 이별의 아픔 중에 기도합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엔 창공을 나르는 새가 되소서. 밝고 아름다운 꽃 길 되소서.”
2,026-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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