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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상정 - 최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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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상정

-글쓴이: 최태진-


담쟁이덩굴이 황토 담을 휘감고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골목에서는 몽글몽글 이야기 꽃이
피어오르는 초가마을이었지만, 아버지 그늘이 없는 어린 나이의 농촌 생활은 힘에 겨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농한기인 겨울철 17세가 되던 해 정월이었다. 나는 사람이 많은 도시로
떠날 생각을 하게 되었고, 객지에서 경쟁과 다툼의 사회생활을 경험했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중에는 영웅적인 위인도 있었고, 심지어 낙오자 신세가 되는 안타까운 사연을
만나볼 수 있었다. 어두운 험한 밤길을 지나면서 재물과 유희에 현혹되지 않았고, 위험한
나이를 탈 없이 보낼 수 있었던 천운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사람이 태어나 한세상 살다가는
천태만상의 인생 무대에서 부와 명예와 권세를 누리던 그렇지 못한 사람이던 나이가 들면
귀천을 막론하고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곁으로 낮은 봉분이 있는 양지바른 고향동산, 외롭지
않은 곳에 묻히고 싶어 하는, 영웅적이면서도 가련한 인생인 것이다.

옛 영광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마음,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가짐을 인지상정이다
라고 한단다.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에서 물장구치던 어린 시절, 또래 아이들과 코스모스 꽃
도장을 찍어주던 동신의 고향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다. 물안개가 자욱이 피어 오르는
수양버들의 계절,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가을, 자연의 생태계가 숨을 고르며 다시 봄을
준비하는 겨울, 새 생명의 산책로, 계절마다 경이롭고 황홀하게 변하는 대자연의 오묘함은
순리이며 겸손이었다. 자연은 특별한 것이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찬찬히 들려다 보면 볼수록
묘하게 마음을 끌어당기는 신비와 축복이 있었다. 산골짝을 흐르는 해동의 물소리를 들으며
마른 나뭇가지에 연두색 새잎이 돋아난다. 긴 겨울잠에서 깬 천수 담 개구리가 기지개를 켜는
봄이 오면 밭갈이 황소 워낭소리, 새소리, 풀벌레소리는 대자연이 들려주는 교향곡이리라.

계절마다 다른 향기와 피고지는 꽃잎과의 눈 맞춤, 천진스런 어린이가 뒷마루에 걸터앉아
햇볕바라기로 행복해하는 숭고한 동심은 자연의 축복이었음을 늦은 나이에 깨닫는다.

예전엔 향수는 사치라고 여겼었는데, 내입으로 인지상정을 말하다니 변해도 많이 변했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실감이 나지 않으나 순리이다. 차 한잔의 호젓한
시간이면 주위가 낮 설고 내 자신이 초라해지는 이방인, 타국은 외로움을 많이 탄다.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그리움은 두말할 나위 없이 품속 같은 모정의 고향이다. 돈과 명예보다 꿈을
쫓아 달려온 뒤섞인 언어 반세기,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내치고 바꾸려는 것만이 해법의
능사가 아니었다. 최고면 무조건 해내려는 무모함의 해법은 더더욱 아니었다. 득을 위해
편법과 타협하기란 난감하고 어지간히 답답한 노릇이기는 하지만, 넉넉한 생활이 부러운 건
부정할 수 없다. 욕망의 유심은 향수뿐이다.

이민 사회에서는 사소한 애정이 말풍선을 뛰어주기도 한다. 근소한 차이이지만, 사사로운 말
한마디에 덕지덕지 가슴 뭉클해지는 우정을 맞는다. 서글서글한 현지인 배려와 따듯한
동포애, 인복이 많은 축복받은 삶에 늘 감사한다.

누구에게나 세수를 한 듯 개운한 날씨일 때와 이유 없이 서러움이 복받쳐 우울할 때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 마음일 때마다 유머 감각으로 흥미와 기쁨을 대신하려고 했던 때를 기억한다.
한세상을 순순한 관광객으로 머물다 가리라는 마음가짐으로 비현실을 유회한 적도 있었다.
싱겁고 미약한 회유(懷柔) 자존심 버린 지 이미 오래다.

붉게 솟는 아침 햇살이 경이롭다. 밀크커피와 빵은 아르헨티나에서 익숙해진 조반이다.
간단한 아침식사가 끝나면 가벼운 걷기 운동을 나선다. 거리행보가 마땅치 않았던지 예전엔
꼬리를 내리고 피하던 동내 개가 제법 경계를 하며 짖어댄다.

역사를 잊은 사람은 미래가 없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어디서 그런 열정과 불온한 사고가
마음에서 울어 나오는 것인지, 불온한 사고에 일조하지는 않았는지 다분히 의문이 인다. 총알
없는 전쟁터에서 코 떼어 주머니에 넣고 땀 흘려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어김 없이 질서정연한 2025년 또 한 해가 저문다. 이제부터라도 허투루 쉽게
가는 길 찾지 말고, 10년 20년, 빛 소리 바람 노을과 함께 고향을 향해 가리라.



202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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