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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to Z] 발렌시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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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재단과 형식의 창조를 통해 21세기 패션계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하우스의 CEO 세드릭 샤비트(Cédric Charbit)가 <WWD>와의 인터뷰를 통해 “혁신은 발렌시아가의 디자인 정신이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핵심이다”라고 밝혔듯, 이들의 모든 행보에는 늘 ‘혁신’이 뒷따른다. 발렌시아가가 기성복과 패스트패션이 주도하는 오늘날에도 럭셔리 패션 하우스로서 굳건히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의 발자취를 30번째 [A to Z]를 통해 따라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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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eganece is elimination(우아함이란 제거하는 것이다)” 발렌시아가의 창립자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Cristobal Balenciaga)가 남긴 어록을 시작으로 그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때는 1895년, 스페인 북부 바스크 해안의 어촌 게타리아에서 태어난 발렌시아가는 생계를 위해 바느질을 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옷에 대한 재능을 가지게 된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감지한 카사 토레 후작 부인(Marquesa de Casa Torres)의 후원으로 12세 무렵 산 세바스찬에 위치한 테일러 고메즈 하우스(Casa Gomez)에서 도제 훈련을 받게 되는데, 왕실과 부유층의 여름 휴양 도시였던 이곳에서 상류 계층의 문화와 취향, 까다롭기로 유명한 영국식 테일러링을 배우며 본격적으로 패션계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1911년 파리 루브르 백화점의 산 세바스찬 지점에서 여성복 테일러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 발렌시아가는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2년 만에 여성 테일러링 워크숍의 수석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업무의 연장선으로 떠난 파리에서 꾸띄리에가 되기로 결심한 뒤, 1917년 세바스찬에서 경력을 시작하고 동업자들의 도움을 받아 1918년 9월 ‘발렌시아가’라는 이름으로 첫 번째 컬렉션을 발표. 이어 1919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독립 스튜디오를 열었고, 1931년 스페인 공화정의 출범에 따른 위기에도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신속히 대응하며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로 지점을 확장하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스페인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발렌시아가는 자국의 비즈니스를 포기하고 오뜨 꾸뛰르의 중심지인 파리로 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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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듬해 친구 니콜라스 비즈카론도(Nicolas Bizcarrondo)와 동업자 블라치오 자보로스키 다탕빌(Wladzio Jaworowski d’Attainville)과 함께 파리 조르주 생크 거리에 발렌시아가 꾸뛰르 하우스를 설립하게 된다. 1937년 8월 17세기 화가 벨라스케스(Velazquez)에게서 영감을 받은 첫 번째 컬렉션을 공식적으로 선보이며 파리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 1958년에는 프랑스 정부 최고 권위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는 등 하우스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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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옷에 몸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옷이 여성을 따라야 한다’는 신념이 꾸띄리에로서의 숙명이라 생각했던 발렌시아가는 재단과 구성의 혁신을 통해 고객의 신체적 결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세련되게 부각시킬 수 있는 디자인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그 결과 대담하면서도 개성 있는 디자인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된 1950년대에는 현대 여성의 일상복과 기품 있는 이브닝드레스로 당대 패션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엘레강스의 대명사’라는 말에 걸맞게 그의 고객들은 모나 폰 비스마르크(Mona von Bismarck), 글로리아 기네스(Gloria Guiness), 마렐라 아넬리(Marella Agnelli) 등 세계 최고의 베스트 드레서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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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승승장구할 것 만 같았던 발렌시아가에게도 위기가 불어닥친다. 1960년대 중반 오뜨 꾸뛰르보다 기성복의 수요가 크게 증가하며 고급 맞춤복을 찾는 고객들이 점차 사라지게 된 것. 시대 변화에 흐름을 맞추는 것을 견디지 못한 발렌시아가는 결국 1968년 마지막 컬렉션을 끝으로 은퇴 선언을 하고 고향인 스페인으로 돌아가 4년 뒤 1972년 3월 24일 세상을 떠난다. 이후 발렌시아가 하우스는 1986년까지 휴면 상태를 유지하며 예전의 명성을 잃게 된다.

GETTY IMAGES / LOVETHATBAG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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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기를 보내던 발렌시아가는 1997년 니콜라 제스키에르(Nicolas Ghesquière)를 수석 디자이너로 맞으며 다시금 부활에 성공한다. 코린 콥슨(Corinne Cobson)과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의 보조 디자이너로 일하며 실력을 쌓은 그는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발렌시아가의 위상을 되찾아 주었다. 현재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브랜드의 스테디셀러 ‘클래식백’을 만든 장본인. 로고 플레이가 만연하던 때, 이 가방은 로고 없이 캐주얼한 감각과 화려한 디테일로만 승부를 봤다. 큼지막한 사이즈와 긴 가죽 태슬, 투박한 스터드까지. 제품의 독특한 매력에 대중은 반응했고, 이는 발렌시아가의 새로운 생명력이 됐다. 하지만 ‘클래식백’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발렌시아가 경영진은 제품을 놓고 "너무 가볍고, 지나치게 부드럽고, 짜임새가 없다"라고 평가하며 발매를 거절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니콜라 제스키에르. 그는 25개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당시 유명 인사들에게 무료로 선물하기를 제안했고, 이후 클래식백은 ‘잇-걸’들의 애장템이 되며 전설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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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루이비통(Louis Vuitton)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어 발렌시아가를 떠난 니콜라 제스키에르. 그 빈자리는 스타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이 채우게 됐지만, 3년 만에 해고를 당하고 만다. 구 시즌에 등장한 디자인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상업적 디자인만 양산했기 때문. 이는 꾸띄르 색채가 강하고 자유로운 느낌을 중시하는 발렌시아가의 결과 맞지 않았다.

main555-08527368-b1c5-45bf-892e-0966c33f0222.jpgVOGUE FRANCE

그 후 2015년, 알렉산더 왕의 후임으로 뎀나 바잘리아가 들어왔다. 베트멍을 이끌던 그는 패션계 관습을 타파한 옷을 디자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무릎까지 내려올 정도로 긴 소매, 비대칭 실루엣, 오버사이즈 룩 등. 이처럼 뎀나 바잘리아는 베트멍에서 선보였던 스트릿 패션을 발렌시아가에 결합하며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그를 대표하는 아이템이 바로 양말과 비슷한 형태를 띤 ‘스피드 러너’와 어글리 슈즈 열풍을 불러온 ‘트리플 S’다. 각각 17 봄,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 시즌에 선보인 두 제품은 발렌시아가의 주가를 최고조로 올려놓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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